근대 도시는 전통적 도시와 달리 산업화 과정 속에서 성장해왔다. 특히 상하이는 개항으로 인해 ‘동방의 파리’, ‘모험가의 낙원’이라 불릴 만큼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한국 지식인들은 1919년 상하이로 몰려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이민이 급증하면서 한인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당시 독립의 희망을 찾아서, 또 조국의 근대화를 모색하기 위해 상하이로 모여든 디아스포라인들의 일상생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필자는 도시산책을 통해 선인들의 다녀갔던 상하이 구석구석의 흔적을 발견하고, 도시에 대한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상하이-서울’과의 비교 속에서 살기좋은 도시에 대한 방향을 탐색하고 싶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 세계 월드코리안 독자들에게 정체성을 찾는 인문학적 토양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 독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사색할 여유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필자 주>

<1회> 상하이 '공원'과 공공성의 의미

번잡한 도시의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공원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 곳에는 지친 일상을 달래줄 여유와 활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원에서는 한국과는 다르게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휴식을 즐긴다. 물을 먹으로 삼아 바닥에 글씨 쓰는 루쉰공원(魯迅公園)의 서예가, 징안공원(靜安公園) 석조탁자에 앉아 장기와 바둑을 두는 동네 할아버지들,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카세트 앞에 둘러싸여 광장 춤을 추는 푸싱공원(复兴公園)의 아주머니들까지. 벤치에 앉아 유쾌한 시민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시의 스트레스로 인해 움츠렸던 마음이 절로 펴진다.

이렇게 따스한 상하이의 공원 풍경은 역사적으로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공원이라는 근대적 산물이 나오기 이전, 중국인들은 ‘정원[園林]’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저택 안에 하나의 자연세계를 구축해왔다. 명나라 때 건립된 예원(豫園)이 대표적이다. 반윤단(潘允端)이 부모님을 위해 18년 동안 지은  이 정원은 강남의 정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전통적 정원이 예원과 같이 사유지라면, 근대식 공원의 핵심은 바로 ‘공공성’에 가치를 둔다.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공원은 산업혁명 이후 악화된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열악한 거주환경에서 생활하는 노동자에게 휴식을 제공을 위해 이용되었다. 다시 말해, 공원은 공동위생과 사회복지와 같은 근대성을 구현하는 장치로 사용된 것이다.

상하이 최초의 근대식 공원은 1868년에 만들어진 공자화원(公家花園)이다. 와이탄(外灘)에 위치해있어 와이탄공원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곳은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악랄한 규정 때문에, 중국인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급기야 ‘납세자에게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달라!’라며 저항했고, 영미 조계당국은 결국 20년 만에 공원의 문을 개방했다. 하지만 ‘서양 옷과 일본 옷을 입은 자에 한해서’라는 굴욕적인 조항은 여전히 존재했다.

프랑스 조계당국은 중국인들의 이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공원'에 대해서는 출입제한 규정을 고수했다.  이유는 “비좁은 공원에 중국인들이 너무 많이 오는 데다, 복장도 불량하고 개들이 변을 보면 치우지도 않아 매우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양인들은 그들만의 잣대로 본국에 적용되었던 ‘공공성’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지워나갔다.

1923년, 주요섭이 본 상하이 '프랑스공원' 풍경

상하이의 여름은 예나 지금이나 뜨겁다. 40도를 훌쩍 넘기는 무더위 속에서 조선인들은 어떠한 여가생활을 보냈을까? 망국인 신분으로 상하이로 건너왔던 그들은 돈을 아껴야했으니 더위를 식혀줄 선풍기나 아이스크림과 같은 근대적 풍요로움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쉬는 방법이라고는 특별한 지출 없이 벤치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하루의 시름을 달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광수가 말한 것처럼 공원은 “조물주가 만든 것보다 더 오묘한 인공적인 매력”도 있으니 공원 산책은 조선인들의 가장 흔한 여가생활이 되었다.

하지만 샤페이루(霞飛路, 현 화이하이루)에 모여 살았던 한국인들이 공원에 가려면 집에서 가까운 프랑스공원(현 푸싱공원)을 지나쳐 더위와 씨름하며 와이탄까지 걸어 가야만했다. 다만 일 년 중 단 하루는 프랑스 조계당국에서 박애정신(?)에 입각해 ‘모두의 공원’을 허락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날로, 이날만큼은 치파오를 입건 한복을 입건 자유롭고 평등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와 「아네모네의 마담」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주요섭은 당시 상하이에 유학하면서, 안창호 선생을 따라 흥사단의 독립운동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한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그는 '프랑스공원'의 금단의 경계에 서서 서양인의 축제 속에 숨겨진 동양인의 참혹함을 목격했다. 그는 나무그늘 아래서 모래장난을 하는 서양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중국, 일본인 유모의 대비되는 모습을 보았다.

더욱 기막힌 것은 마땅히 서양인 아이들과 어울려 놀아야할 중국 아이들이 시커먼 테니스 휘장 안에 갇혀 서양인 부모가 흘린 공을 이리저리 줍는 장면이었다. 그가 만난 상하이는 중국이지만, 또한 중국이 아니었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념하는 날에, 이 표어가 무색할 정도로 동양인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며, 조롱하는 풍경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주요섭이 근대적 공원의 이면에 숨겨진 식민지적 의도를 간파하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서양인들은 중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고자 공원을 지은 것이 아니라, 단지 '백인들 자신을 위해' 편의시설을 만든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공원을 땀 흘려 지은 중국인 노동자는 오히려 그 근대의 문명에서 배제되었으니, 주요섭이 프랑스공원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된다. 공공성을 가장한 근대식 공원은 실제로는 서양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일종의 식민화 장치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30년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1928년 6월 18일, 프랑스 조계당국이 마침내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조항을 없애고 입장료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깨어있는 상하이 시민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각계의 시민들은 조계당국에 부단히 탄원서를 써서 공원 규정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1925년 발생한 5·30 스트라이크는 중국 전역에 반서구 분위기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프랑스 조계당국은 시민들의 압박에 못 견뎌 공원을 전면 개방한 것이다.

그 뒤로 이 곳은 특파원 홍양명이 “조선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공원”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조선의 피 끓는 청년들의 발자국이 찍혀있는 곳”이 되었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과 함께 거사를 치루기 전이면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프랑스 공원을 찾았고, 작가 김광주 역시 자주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몽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모두의 공원, 또다시 경관의 사유화로

일본이 패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새 시대가 열리자 상하이시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식민지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서양인의 놀이터였던 경마장을 허물고 1951년 인민의 이름으로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간을 되돌려 주었다. 그들은 다시 땅의 주인으로 돌아와 호금을 켜고, 광장 춤을 추며, 공놀이를 하며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구시가지 푸시(浦西)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신시가지 푸동(浦東)의 공원에 들어가려면 초고층 빌딩숲 사이의 넓은 도로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발걸음 또한 단조롭고 지루하다.

2000년대부터 가속화된 도시개발 붐은 부유층으로부터 공원이 사유화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스지공원(世紀公園)이나 펑라이공원(蓬萊公園) 은 고층 아파트들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누군가 응시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산책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벚꽃으로 유명한 구춘공원(顧村公園)은 심지어 공원 안에 ‘관광객은 출입금지’ 구역을 두었다. 출입금지 구역은 ‘이국 풍경촌’이라 불리는 프리미엄 상업공간으로 야외 웨딩홀을 운영되고 있다. 공원 입장권을 내고도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져 자연스럽게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과거의 팻말이 연상시킨다.

이러한 씁쓸한 현상은 비단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천혜의 자연경관인 제주도 주상절리대는 부영호텔의 공원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는 등 모든 시민들이 누려야할 공간이 부유층에게 점점 귀속되는 듯하다. 도시의 공공성이 외면당하고 도시 경관의 사유화가 비일비재한 오늘, 과연 우리는 과거보다 더 근대적이고 진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하이 100년의 공원역사는 공간의 사유화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상하이는 1928년 현지 시민들이 이룩했던 쾌거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공공성을 복원하기 위한 지혜를 짜내야 한다. 공원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 이재희 박사

*<필자소개> 이재희 박사는 중국 화동사범대학교에서 7년간 근·현대문학과 문화연구를 통해 상하이 도시의 진실한 모습을 복원하고자 노력해왔다. 중국 상하이대학교에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인생의 비전과 꿈을 만드는 글로벌 리더십프로그램(GLP)을 기획하고 교육하는 프로그램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