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윤 전 SBS 북경특파원.

훠궈(火鍋)는 중국에서 ‘불 때는 솥’이라는 뜻의 주방기구를 이르는 용어지만, 끓는 탕에 고기나 해물, 채소를 살짝 익혀 먹는 일종의 ‘샤부샤부’ 같은 음식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원앙 훠궈는 매운탕과 맑은 탕이 솥 안에 태극무늬 모양으로 나뉘어 있어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다.

매운탕을 사용할 때는 깨장(芝麻)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고, 맑은 탕에 고기를 익힐 때는 간장 소스를 쓴다. 매운탕은 고추를 쓰는 까닭에 단순히 육수만을 사용하는 맑은 탕에 비해 비등점이 높아 훨씬 빨리 끓는다. 육수는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우려 만든다. 주로 얇게 썬 양고기를 익혀 먹지만 쇠고기와 새우, 오징어 등 해물을 넣기도 한다.

다 익혀 먹고 난 다음 온갖 맛이 더해진 육수에 면을 넣어 끓여 먹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배추 뿌리로 만드는 중국식 짠지인 ‘짜차이(搾菜)’를 반찬으로 해서 먹는다. 나는 홍두부(紅豆腐)를 곁들이는 걸 즐기는데, 홍두부는 두부를 발효시킨 것으로서 명란 비슷한 맛을 낸다. 열도를 계속 유지하며 먹어야 하는 음식이어서 북방 음식으로 여기기 쉬우나 사실은 매운 걸 좋아하는 남쪽 사천성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다.

한 여름 40도를 오르내리는 염천에 여럿이 이 솥을 끼고 둘러앉아 먹는다고 해서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음식’으로 불린다. 시작은 사천성이었지만 지금은 전 중국에서 맛볼 수 있게 됐다. 내가 이 음식을 처음 접한 것은 1991년 연말 베이징에서였는데 눈이 내리는 밤에 처음 접한 음식이어서 그때는 더운 사천지방의 음식인 줄 짐작도 못했었다.

훠궈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처음으로 ‘중국’을 만났던 인상 깊은 날이었다. 저녁 7시. 눈발은 완전히 멈추었으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무료해하던 나는 호텔 근처 똥청취(東城區) 야시장 거리로 나섰다. 늘 그렇듯이 이곳은 내외국인이 함께 뒤섞인 채 혼잡스러운 모양새다.

북경인들이 우리의 신선로 같은 훠궈(火鍋)를 안주삼아 얼궈터우져우(二鍋頭酒)를 마시고 있다. 야채를 삶은 탕에 얇게 썬 양고기 편(片)을 데쳐 먹는다. 그야말로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엄동설한에 훠궈(火鍋)를 둘러싸고 앉아 독주를 마시며 밤이 이슥하도록 정담을 나누는 것이 베이징 주사(酒士)들의 겨울 풍류다.

무엇으로 요기를 삼을까 망설이다 우리 돈 200원을 주고 사천 국수 한 그릇을 시켜 서서 먹고 있는데 옆 자리의 풍류남들이 동석을 권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한 사람이 앞으로 중국에 살려면 술에 관한 유머를 알아야 한다”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두 친구가 술 시합을 벌였는데 패자가 비틀대며 소나무에 기대 서 있다가 자기를 부축하는 걸로 여겨 자존심이 상해 말했다. “이봐! 나 안 취했어! 놓아! 놓으란 말이야!” 그랬더니 소나무가 가버렸다는 우스개였다. 중국식 과장과 허풍이 섞인 얘기였는데 나는 한참을 웃었다.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개그였던 까닭이었다. 내 웃음소리가 야시장의 대기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즐거운 술자리였다.

이듬해 여름 쓰촨성 광안(廣安)현으로 등샤오핑의 생가를 찾아가던 길에 충칭(重慶) 외사판공실(外事辦公室) 왕 주임의 안내로 본토의 훠궈를 맛 볼 기회를 가졌다. 장맛의 탕과 육수 탕이 태극무늬처럼 나뉘어 있는 원앙(鴛鴦) 식 훠궈가 일반적이다.

취향에 따라 탕을 선택해 육류와 해물 그리고 두부와 면을 넣어 먹는다. 파 양념장과 땅콩 소스 혹은 명란 맛의 홍두부 소스를 입맛대로 곁들인다. 나는 양고기와 시금치를 땅콩 소스와 홍두부에 찍어 먹는 게 좋았다. 마지막에는 남은 육수에 생면을 넣어 칼국수처럼 만들어 먹었다.

이 날의 훠궈는 맛도 훌륭했지만 손님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충칭 사람들은 하나같이 매운 맛이 강한 마라훠궈(麻辣火鍋)를 즐기고 있었다. ‘마라(麻辣)’는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맵다는 뜻이다. 여름 충칭은 ‘화로’에 비견될 만큼 뜨거운 곳이다.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는 까닭에 사우나와 진배없어서 이곳 사람들은 피부가 좋다. 충칭 사람들은 그 무더위 속에서 ‘뜨거움으로 뜨거움을 이긴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발원지답게 맵고 뜨거운 훠궈로 더위를 이기고 있었다.

훠궈는 흔히 쓰촨 요리로 여겨지지만 원래는 몽골족이 전장에서 신속하게 해 먹던 전투음식이었다. 13세기 말 원(元) 제국이 중원을 지배하면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1980년대 등샤오핑 집권 시 그의 고향 음식인 쓰촨 요리가 세를 얻어 널리 보급되면서 지금은 전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메뉴가 되었다.

훠궈는 1992년 한중 수교 후 한국에도 전해졌다. 1996년 최초의 중국 음식 자본이 여의도에 요리집을 냈는데 훠궈 집이었다. ‘중경신선로’라고 이름 붙인 이 집은 언론사 베이징 특파원과 상사 베이징 주재원 출신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언론인과 중국 대사관 인사들과의 만남도 이곳에서 많이 이뤄졌다. 이어서 신촌에 또 다른 훠궈집이 생겼다. 중국 대사관 지도부는 이곳을 더 선호했다.

‘나 같은 건 또 없다’라는 뜻의 ‘불이아(弗二我)’라는 이곳에서 2003년 8월 25일 당시 리빈(李濱) 중국대사와 만났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는다. 술잔을 기울이다 주흥이 오른 리 대사가 시 한 수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해석을 구했더니 ‘양주팔괴(揚州八怪)’로 불리던 청나라 시인 판교(板橋) 정섭(鄭燮)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비로소 ‘난득호도(難淂糊塗)’가 ‘총명하면서도 바보처럼 굴어야 하는 게 어렵다’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재주를 드러내지 말고 숨기며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는 뜻의 이 말은 유비가 조조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나약한 것처럼 굴었던 일화에서 유래한 ‘칼날의 빛을 칼집에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가장 교훈으로 삼는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평소 인문학에 조예가 깊고 낭만적인 성향이었던 리 대사의 풍모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리빈(李濱) 대사가 직접 써 준 시 정섭(鄭燮)의 ‘난득호도(難淂糊塗)’ 정섭이 직접 쓴 글씨 ‘난득호도(難淂糊塗)’

훠궈를 둘러싸고 앉으면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마음이 풀린다. 아마 다양한 재료들이 가미되는 요리여서 미각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즐거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이 요리를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늘 오래전 베이징 주사들이 내게 들려주었던 그 개그를 꺼내놓는다. 어김없이 친구들은 웃음보를 터뜨린다. 훠궈는 좋은 기억 덕에 더욱 좋아지는 음식이다.